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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막의 커튼에서 해골은 웃고 있다.

당근유니버스 2022. 4. 13. 20:57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

 

비가 내리고 있던 아침이었다. 카츠라기 후유카는 핸드폰으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일어나 제 상사가 보낸 문자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인상을 찌푸린 체 읽기 시작했다. 저녁 9시에서부터 새벽 4시까지 짧지만 많은 문자들로 스마트폰의 알림 창이 거의 문자로 채춰질 정도였다. 후유카는 알림 창에 뜬 문자들을 지우고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씻는 동안 전화가 올리가 없겠지.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올리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후유카는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세차게 내리는 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에게 내려오고, 욕실을 가득 매운 연기가 란의 신경질적인 전화를 잊게 할 정도로 공간을 채워갔다. 몇십 분의 샤워가 끝나고 가지런하게 옷걸이에 걸어진 검은 블라우스와 살색 스타킹을 먼저 신고 바지를 입은 후 탁자 위에 올려진 휴대폰을 핸드백에 넣고 나서야 후유카는 집 밖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직장으로 운전하는 내내 전화를 하는 란의 행동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회사에서 얘기하시죠."

-"아침에 내 전화 안받더니, 지금은 받았네요. 어젯밤에 보낸 내용은 봤나요?"-

"안 그래도 일어나자마자 확인했습니다. 운전 중이니 이만 끊도록 하죠."

-"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카츠라기 씨."-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란과는 달리 후유카는 통화를 끊고 난 뒤의 찝찝함에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는 그대로 빌딩의 승강기를 향해 걸어갔다. 층 버튼을 누르고 건물로 올라가는 내내 오늘도 어떻게 자신을 귀찮게 할지 짜증이 났지만 어차피 자신이 무시하면 그만인 것이기에 그녀는 층에 도착하는 알림 벨이 울리자마자 곧장 그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낯선 남자가 란의 다리를 엎드린 체 바치고 있었으며 동생인 린도는 소파에 앉아 구경할뿐이었다. 이사람들이 원래 이랬지. 후유카는 보고서와 동시에 그의 스케쥴이 적힌 문서를 들고 란에게 향했다. 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후유카에게 넌지시 윙크를 날려보지만, 후유카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일정을 읽을 뿐이였다. 일정이 적혀진 문서를 읽은 그녀가 자신의 할 일을 하려고 나가려는 순간, 란이 후유카를 붙잡았다. 

 

"어디가, 오늘은 같이 이동해야 하는 날이 많잖아."

"저는 잠시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이타니 씨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마무리 짓고 오시죠."

"후유 쨩은 자기 일에 집중해서 대단한 거 같군요."

 

란이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후유카는 신경도 쓰지 않은 체 그저 밖으로 나갈뿐이었다. 린도는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가 살짝 매정하다고 느꼈지만, 란은 자신을 신경쓰고 있지 않는 후유카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받치고 있던 사내를 발로 차버리고 난후 옷걸이에 걸려진 청색의 정장 자켓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린도 역시 자신의 형의 뒤를 따라가며 후유카가 있는 휴게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준비가 다 끝냈다는 듯 서있으니 후유카는 두사람에게 걸어와 거래처가 있는 주소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세사람은 승강기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말없이 있었고, 지하 2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검은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후유카는 범천에서 주는 월급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차 만큼은 바꾸기 싫었다. 후유카가 직장을 다니는 기념으로 그녀의 양부모가 취직을 축하한다며 선물로 준 차였기에 하이타니 형제가 바꾸라고 말을 해도 그녀는 그 말들을 흘려들을 뿐이였다. 그녀의 차를 타고 거래처가 있는곳으로 가는 내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란이 말을 걸어보려고 하지만, 후유카는 그저 운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로를 주행하는 내내 후유카는 빨리 일이 끝나 퇴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느새 거래처 빌딩에 도착한 승용차가 지상 주차장에 들어오자, 왼쪽 끝부분에 주차한 뒤, 후유카가 먼저 내려서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린도와 함께 내린 란은 그녀에게 윙크 한번 던져보지만, 그의 행동에도 시종일관 무표정을 짓는 후유카의 모습에 아깝다는 듯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을 열자 범천과 거래하는 야쿠자들이 하이타니 형제를 반기는 동시에 후유카에게 관심 있다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 살갑게 웃던 눈빛은 어디로 가고 란의 표정은 어두워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직원이 자신의 상사에게 귓속말을 하자마자 그는 기침을 한번 하고는 자신의 일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시부야에서 사용하지 않는 땅에 대한 이야기부터 요코하마에 있는 부지를 통틀어 땅에 대한 소유권을 범천에 넘기는 조건으로 자신들에게 2배가 넘는 금액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후유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신들과 거래하는 이들의 제안은 터무늬 없어 보였다. 란은 며칠 후에 전화를 주겠다 하며 린도와 후유카에게 손짓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낸 뒤 건물을 빠져나와 범천의 아지트로 향했다. 운전석에서 아무 말도 없던 후유카가 란에게 물었다.

 

"이번 거래는 잘 성사되지 않았나 보군요."

"터무늬 없는 금액으로 요구하는 걸 보면 정상은 아니죠. 그래서 다음 스케줄은?"

"총장께서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전부 기억하고 있다니, 카츠라기 씨는 대단하군요."

 

란의 칭찬에도 후유카는 그저 핸들을 잡고 아지트로 운전할 뿐이었다. 빗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운전하면서도 란의 눈빛을 무시하던 그녀는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열려는 순간, 린도가 그녀에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열 테니까 그냥 내리기만 해."

"린도, 반말 쓰지 말아야지."

 

살갑게 웃으면서 얘기하는 란이 문을 열자마자 후유카를 붙잡고 싶었으나, 그녀는 이미 운전석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건물에 들어갈 뿐이었다. 하이타니 형제가 승강기로 들어가 총장인 사노 만지로에게 가는 동안 후유카는 휴게실에서 조용히 티백이 든 작은 봉지를 찢어 포트에 담긴 뜨거운 물을 종이컵에 붓고 유리창을 바라봤다. 수많은 조명들이 내는 불빛은 지상의 바닥에서 피어나는 불꽃놀이처럼 저마다 다른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후유카는 유리창으로 보이는 도심 속 불빛이 아름다우면서도 싫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공간은 마치 화려하게 빛나는 감옥처럼 겉으로는 빛나고 있지만 속은 심연으로 가득 찬 어둠과도 같았다. 후유카는 자신이 스카우트되던 날을 떠올렸다. 비가 내렸던 그날, 후유카는 건축회사에 일하던 직원이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안 좋은 일들이 가득했고, 회장이 비리혐의로 붙잡혀 생활고에 시달리는 일이 반복되어 갈 때쯤이었다. 장마로 우산이 휘청거릴 정도로 비를 세차게 맞던 날, 검은 우산을 쓴 누군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짙은 남색의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체 투명한 우산을 쓰고 있는 후유카에게 다가왔다. 웬 이상한 신사가 자신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도 수상하지만, 그가 넌지시 걸었던 말이 수상하게 들려왔다.

 

"당신의 회사가 곧 부도난다는 소문이 이쪽에서도 들려 당신을 스카우트하러 왔습니다, 카츠라기 후유카 씨."

 

회사 소문은 뉴스에서도 들렸지만, 뒷 세계에서도 퍼진건가. 후유카는 그런 그를 무시한체 뒤를 돌아 걸어가려는 순간, 그가 후유카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이 우산을 놓치고 빗속에서 보였던 것은 마치 비를 맞은체 아랑곳하지 않고 웃고 있는 란의 모습이였다. 하이타니 형제에 대한 소문은 익히들었지만, 이렇게 나타날줄이야. 후유카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완강하게 붙잡고 있어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그대로 하이타니 란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뒷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회사를 이직해도 위험천만한 회사로 하다니, 게다가 억지로 이직된 것은 자신의 의지로 한 것이 아녔기에 후유카에게 있어서 가장 난처한 일이 되어버렸다. 범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후유카는 몇 번이고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그럴 때마다 란이 사직서가 든 봉투를 찢거나 태워버리기 일수였다. 반복해서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도, 하이타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 그의 시선이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것도 지쳐가던 후유카였기에 그녀는 란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

 

회의가 끝난 후, 란은 카츠라기 후유카에게 서프라이즈 이벤트 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범천에 데려와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 싶어서 데려온 것인데, 침묵과 무시로 일관하는 그녀의 행동에 점점 더 이끌리는 것 같았다. 란의 표정을 본 산즈는 그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마이키에게 가고, 코코 노이는 이번 달 수익에 대한 정산 때문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린도는 란을 따라 후유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소파에 앉아 있던 후유카는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소파에서 일어나 다음 일정을 말하려는데, 란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후유카를 바라보며 있는데, 후유카는 란의 시선에도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말했다.

 

"업무 끝났으니 들어가 보겠습니다."

"벌써 퇴근시간인가요, 후유카 씨 오늘 시간 있으면.."

"없습니다.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후유카의 태도에 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떻게 하면 그녀가 자신만을 바라보게 할지 궁금했다. 평소라면 붙잡고 얘기했지만, 다른 방도를 써보고 싶은 란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눕더니 산즈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즈 자고 있어?"

-"이 시간에 왜 전화질이야, 하이타니 란 이 미친놈아."-

"우리 저번에 받았던 관광지 처리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그거 네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했잖아. 나 바쁘다, 끊어."-

"그럼 알아서 처리한다?"

-"바쁘니까 끊으라고!!"-

 

거칠게 소리 지르는 산즈의 목소리가 린도에게까지 들려오고 란은 지난번에 얻었던 땅으로 후유카를 어떻게 놀라게 할지 생각했다. 평범한 프러포즈로는 안될 것 같고 그렇다고 레스토랑에서 그녀의 환심을 사는 것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형의 모습에 린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에 안 쓰던 땅은 어떻게 처리하려고?"

"마침 그곳에 고장 난 놀이기구들이 있으니 그것들 처리하고 나서 생각해볼까."

"산즈가 아무렇게나 처리해도 상관없다고 했으니까 거기 부품 몇 개 들고 오자."

 

후유카와 같이 거래처를 만나기 전, 형제는 범천의 땅이 된 지역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미 폐쇄된 유원지였고, 낡은 놀이기구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삐꺽 거리는 관람차를 시작으로 머리가 휘어진 말들로 가득한 회전목마가 유원지의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었기에 누군가가 본다면 마치 귀신이 그곳을 아지트로 삼은 것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처리하기도 애매한 놀이기구들을 소각해야 하는 일들 역시 부총장인 산즈 하루치 요가 내린 지시이기에 란은 그것들을 이용해 후유카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마침 비가 내리는 날씨도 아니기에 하이타니 형제는 못치에게 문자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말한 뒤, 후유카에게는 저녁 늦게 출근하라는 문자를 남긴 체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늦은 시간에 출근하라는 상사가 있다면,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하겠지. 후유카는 집에서 차를 마시며 코코 노이가 사진으로 보내준 유원지의 사진을 봤다. 후유카가 어릴 적, 그녀의 양부모가 치아키와 그녀를 데리고 한번 들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치아키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와 후유카가 놀이기구를 타고 아버지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만 해도 후유카는 치아키의 괴롭힘을 무시하고 있었던 나날들을 지내왔던 터라 유원지에서 즐기는 것도 석연치 않았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부모님의 정성에 어린 후유카는 양엄마에게 웃으며 그날을 즐겼다. 그것이 몇 년이 지나고 난 후에는 별것 아닌 추억으로 남아있었지만, 낡아버린 유원지의 모습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저녁 8시가 다되어 갈 때쯤, 란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 문자에 적힌 주소로 와줘.-」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던가? 후유카는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란이 적어준 주소로 이동했다. 부슬거리는 빗속으로 운전 중인 후유카는 무슨 일이 되었든 간에 빠르게 처리하고 퇴근하고 싶었기에 속도를 줄여가며 운전했다. 그녀가 운전하는 내내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붉은 무언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주소를 확인해보니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주소가 눈앞에 보이는 곳이었다. 핸들을 잡고 액셀을 밟은 체 불길이 치솟는 곳으로 운전하며 이번엔 어떤 미친 짓을 하고 있을지 머리가 살짝 아파진 후유카는 주소가 적힌 곳에 도착하자마자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껐다. 그녀는 뒤 자석에서 린도가 두고 간 우산을 꺼내 운전석에서 문을 열고 그들이 있을만한 곳으로 걸어갔다. 젖어버린 땅을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땔때즘, 그녀의 앞으로 거대한 화마가 눈앞에 보였다. 삐걱거리는 관람차와 바이킹이 불에 삼켜지듯 녹슬어버린 철들 이 녹아내리고 있었고, 기구들 가운데에서 메인을 장식하는 회전목마는 불길에 녹아내리면서도 빙글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젠 추억을 불 테우 기라도 하는 걸까, 후유카는 멀리서 불타고 있는 회전목마의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비가 내리는 유원지에서 타오르는 나무의 냄새와 화려하게 빛나는 불길들 사이로 후유카는 방향을 돌려 기구들을 불태우며 웃고 있는 란을 쳐다봤다.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은 체 란은 불타오르는 회전목마의 앞에서 덩그러니 그녀만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들고 있었으나, 후유카는 그대로 그에게서 발길을 돌려 타들어가는 놀이동산을 뒤로한 채 차로 돌아갔다. 

 

멋진 프러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꽃다발을 바닥에 떨군 체 우비를 쓰고 있는 린도와 칸지가 비를 맞으면서 돌아오는 란의 모습에 뭔 짓을 하고 온 것인지 그의 웃음에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고 어두웠다. 형의 표정을 알아차린 린도가 우산을 씌우고 나서 불타는 유원지에서 벗어나 셋이서 차를 타고 갈 때, 저 멀리서 후유카의 승용차가 보였다. 란이 그녀의 차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만지로의 호출에 쫓아가는 것을 뒤로하고 범천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불타는 유원지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유카는 란의 문자를 삭제한 뒤, 갈색 소파에 누워 속으로 말했다.

 

'거기서 꽃다발은 왜 들고 나온 거야, 미친놈....'

 

********

 

거래처의 배신으로 한동안 바빴던 날을 보낸 란은 비서인 후유카가 이번 주에 있는 스케줄을 말하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는 그녀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고 싶었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어제 자신들이 불태운 유원지의 불길처럼 강하게 이끌리며, 눈동자는 으스러진 석류를 생각나게 할 만큼 란의 머릿속과 마음을 점점 채워가고 있었다. 단순히 후유카에게 흥미가 생겨 범천에 데리고 온 것인데,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려버려 이제는 카츠라기를 다른 남자의 곁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후유카와 일 문제로 얘기를 하던 남자가 그녀에게 호감 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때, 란은 입가에 웃음을 띄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를 어떻게 처리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저녁, 란은 후유카에게 번호를 저장한 남자를 불러들여 조용히 얘기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삼단봉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남자는 이유모를 란의 폭력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권총을 소매에서 꺼내는 순간 린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동생이 잡고 있으니 란은 기특하다는 듯 린도의 머리를 쓰다듬고 붙잡힌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녀와 얘기하던 눈동자도, 대화를 나누던 그 입이 자신이었으면 했지만 후유카는 란에게 단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거래처의 남자가 심하게 두들겨 맞아 범천으로 오지 않았을 때, 산즈가 형제가 있는 방의 문을 발로 차며 들어왔다.

 

"산즈, 왔어?"

"하이타니 미친놈들아, 어제 뭘 했길래 거래처에서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계약하겠다고 말하는 거냐." 

"단순히 거래 좀 하자고 했을 뿐인걸."

"거래로 사람 패는 게 특기냐? 다음에도 이러면 진짜 니들 모가지 스크랩해버린다."

"네네, 알겠으니까 들어가 봐."

 

산즈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갔다. 란은 만족하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후유카가 내민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린도는 패드에 적힌 스케줄을 읽는 후유카를 그리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란은 자신의 곁에서 문서를 주고 나가려는 후유카가 좋았다. 그녀가 업무로 나간다며 문을 열려는 순간, 란이 후유카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번엔 무슨 일로 잡으시는 거죠?"

"내일 시간 있나?"

"저번처럼 불타는 유원지에서 고백하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이번엔 달라, 자기야. 내일 내가 찍어준 주소로와. 장소는 다른 곳이니까."

"알겠습니다, 하니타니씨."

 

후유카가 나가고 란은 그녀가 떠나가는 뒷모습까지 바라만 보더니, 문이 닫히자 자신의 책상 서랍 안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녀의 눈빛과 닮은 가넷이 박혀있는 목걸이였다. 그는 후유카의 목에 걸어주며 그녀를 자신의 것이라고 표시하고 싶었다. 란은 밖으로 나가며 범천을 배신한 조직원들을 처리하면서도 후유카에게 고백할 내일의 일을 떠올리면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피 묻은 삼단봉을 닦아내며 시신이 든 자루를 밑으로 처리할 때, 살짝 흥얼거리는 모습에 산즈는 그가 미쳤다는 듯 인상을 구긴 체 배신자들을 처리했다. 그들이 일을 하는 동안 후유카는 정리하지 못했던 문서들을 정리하고 내일 처리해야 할 업무내용들을 봤다. 다행히 두 건의 이동을 제외하면 다른 일은 없었기에 하이타니 란의 개인적인 일만 끝내기만 하면 됐었다. 후유카는 퇴근한다는 문자를 남겨두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운전하는 내내 바빠지는 스케줄이 없어서 좋았지만, 란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싫었기에 가급적이면 그가 간단한 용무만 하고 끝내주길 바랬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샤워를 끝내고 조용히 신문을 읽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후유카가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자리에는 상자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테이프를 뜯고 자신에게 보내진 택배의 내용물을 꺼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어깨가 도드라지며 붉은 천으로 된 투피스 정장이었다. 후유카는 란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옷을 보낸 것인지 어이가 털려진 체 옷 속 안에 있는 편지를 보고는 종이만 쓰레기 통에 던진 체 슈트를 옷걸이에 걸어놨다. 그가 이런 옷을 보내는데 이유는 없겠지. 간부들 회식이라도 있어서 보낸 것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예상은 엇나갔다. 저녁시간이 되었을 때쯤, 승용차를 타고 가려는 후유카의 앞에 회색빛의 벤츠 한 대가 서있었다. 창문이 내려지자, 차의 주인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는데, 후유카가 자신의 승용차로 가려고 하자, 그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에 또 뭔 짓하려고 온 거야, 미친놈아."

"걱정 마, 그때처럼 불 지르는 일은 없어."

 

후유카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차에 타 뒷좌석에 앉은 체 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창가로 비치는 불빛들을 바라봤다. 란은 붉은빛의 투피스를 입은 후유카의 모습이 붉은 백합꽃 같아 백미러로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그가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했을때,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세우고 그녀가 있는 뒷자석의 문을 열었다. 란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할때, 후유카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장소를 바라봤다. 야외에는 분수대가 있고, 그안에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촛대가 있는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였다. 서있는 후유카에게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듯, 능글맞은 미소로 웃는 란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유카는 란의 행동에 어차피 업무의 일종이니 어울려준다는 생각으로 그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란이 예약해둔 자리로 가니, 옆에는 분수대가 있었고 멀리서 보이는곳에 환한 불빛에 비춰지며 돌고 있는 옛날식 회전목마가 보였다. 후유카는 이런 자리에서도 란의 시선이 싫었기에 무표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는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때, 그들의 테이블로 레드 와인 두잔이 나오고 후유카는 란과 술마시는것이 싫어 자리를 박차고 다른곳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란은 그 뒤를 몰래 따라다니며 후유카가 회전목마의 앞에 서 있을때,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환한 불빛 아래 돌고 있는 회전목마의 멜로디를 뒤로 하고 란이 그녀의 목에 가넷이 박힌 목걸이를 걸었다. 후유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뒤를 돌자, 란이 흐믓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저번에 했던 프러포즈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바꿨어. 여기서 우리 둘만 남았네, 누나."

"아, 그러냐."

 

란의 미소에도 후유카는 아랑곳하지 않은 체 그의 작업이 싫증 났다. 멋대로 자신의 비서로 만들어놓고 이제는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인지 그녀는 란의 곁에 있는 자신이 싫었다.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후유카의 눈빛은 란의 마음을 몇 번이고 흔들어 놓았다. 밝게 비쳐 가는 불빛의 근처로 란은 조용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 만이 남은 회전목마의 근처에는 전등의 불빛에 달려는 나방들만이 있었고, 고요한 버드 키스를 마친 란이 후유카의 목덜미에 자신의 것이라는 듯 키스마크를 남기자마자 후유카는 그에게 말했다.

 

"미친놈."

"내가 미쳤다는 걸 이제야 안거야?"

 

후유카가 자신을 뭐라고 불러도 그저 자신의 곁에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던 란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후유카는 란의 손을 몇 번이고 뿌리치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아아, 란은 자신과 후유카와 있는 지금의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거나 말을 거는 것도 없는 체 붉은 장미 같은 카츠라기 후유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곁에 두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