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커튼콜
자, 연극을 시작해봅시다. 무대의 주인공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군요. 아, 이 연극의 내용은 무엇으로 정하시겠습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남녀의 이야기? 아스라이 빛나는 사랑을 한 연인의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이건 어떨까요?
애타는 남자의 사랑에도 받아주지 않는 어느 제비꽃의 눈동자를 가진 흑단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냉동고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 너머로 '하이타니 린도'는 조직을 배신한 사람들의 뒷처리를 '산즈 하루치요'에게 맡겨놓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 장소에만 있으면 왠지 모르게 비릿한 냄새와 자신의 신발로 튀이는 붉은 피에 저도 모르게 진저리가 날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형인 '하이타니 란'과 함께 새로운 조직 '범천(梵天)'에 들어가 간부로 활동하면서 다른 조직들을 누르고, 때로는 배신한 조직원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다. 일이 끝나지 않은 와중에도 그는 형과 함께 차를 타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20층에 도착하자 바로 승강기에서 내려 자신들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린도가 문을 열고 안에서 보였던 것은 조용히 차를 끓여 마시며 소파에 앉아 있는 '타마키 아키라'였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하이타니 형제의 모습에 말도 없이 그저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아키, 밥 먹었어?"
"......"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아키라의 모습에 린도는 멋쩍다는 듯 자신의 재킷을 걸어두고 이내 천장에 있는 컵라면을 꺼내 들었다. 마침 그녀가 차를 끓이고 썼던 포트에 아직 뜨거운 물이 남아있어 곧장 뚜껑을 열어 물을 붓고 난 뒤 유유히 의자에 앉아 라면이 붇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의 고요한 침묵에 란은 한숨을 내쉬고 아키라가 들어간 방앞에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계속 안 나올 거야?"
"아까 먹었으니까 재촉 그만해."
"다정하게 대해줘도 까칠하게 나오네."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문 앞에서 유감이라는 듯 란은 뒤로 돌아 동생인 린도에게 걸어갔다. 그는 마지막 하나 남은 컵라면을 린도가 남겨놓은 것을 보고 살짝 웃고는 젓가락을 꺼내 들어 이내 불어버린 면을 먹었다. 린도는 란이 먹는 모습을 보다가 유유히 아키라가 있는 방문을 열고 조용히 옆에 앉으니 아키라는 린도의 옆에서 멀리 떨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흑단에 긴 웨이브 스타일로 5대5가르마를 하고 있는 이 여인은 한 번도 그의 행동에 반응조차 하지 않은 체 물끄러미 허무의 바다를 띈 눈동자를 한 체 미동 없이 천장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린도가 아키라의 손을 몇 번이고 잡으려 들려해도 아키라는 그저 그의 손을 피할 뿐이었다. 아키라는 하이타니 형제가 들어올 때마다 그들에게서 느껴졌던 피비린내와 무거운 공기, 사람에게서 느껴지기에 가장 무서운 것들이 아키라의 두 팔과 다리를 잡는 것 같았다. 저항하면 할수록 끌어당겨지는 힘과 언젠간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두 사람의 두 자수정의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심연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사실 하이타니 형제와 아키라의 사이는 거의 최악이었다. 2005년 전 발할라와 도쿄 만지회의 투쟁이 시작되어 있을 때 그들은 아키라를 데리고 본 적이 있었다. 흑(黑)색의 말들과 백(白)색의 말들이 체스판 위에서 싸우듯 아키라는 그 체스판에서 움직이는 말들의 싸움에 눈길을 한번 주다가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바람 한점 없는 허공의 하늘은 어찌 이리도 맑았는지, 이 싸움과 관계없는 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연하게 흐트러진 파란색을 비춰내는 천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잠시 짤막하게 끝나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하나가키 타케미치'가 수많은 발할라의 인원들과 싸우면서 지쳐있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일어나 싸우는 모습에 아키라는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치고 쓰러져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그녀의 눈 속 심연이 물방울을 내려는 찰나, 긴 머리를 한 남자가 다른 인원에게 찔리는 동시에 사이렌이 울리자 린도가 아키라의 팔을 잡고 그대로 현장을 달아나버렸기에 심연으로 들어선 빛은 서서히 어둠에 먹혀갔다.
투쟁이 끝난 뒤에도 하이타니 형제는 늘 그래 왔듯 자신들을 상대하는 사람을 향해 가차 없이 주먹과 무기를 휘두르며 그날도 피비린내를 풍겼고, 아키라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콘크리트 바닥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것과 움직임도 숨을 쉬는 소리를 내지 않는 남자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키라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유유히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도시의 찬란한 불빛과 그들이 폭력을 내두르는 다리 밑에서 그저 고요하게 밤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 무대를 바꿔봅시다. 잿빛의 과거를 색채가 흘러나오는 미래로 넘길까요? 아, 이 무대에서 두 사람의 불안정한 불꽃이 흔들리고 있군요. 자자, 서두릅시다! 무대의 막은 아직 내리지 않았어요! 이어갑시다, 허공에 타오르는 남자의 심장이 말하는 이 무대의 막을!
12년이 지난 지금도 아키라는 이들에게 묶여있는 자신이 싫었다. 그렇다기보다 그들과 같은 조직원이라는 자체가 싫었다. 또 다른 거대 조직인 '범천(梵天)'은 말 그대로 범죄조직이었다. 아키라의 일은 간단했다. 범천의 뒷일이 누설되지 않게 회사 사원으로서 움직이라는 것 밖에 없었다. 아키라가 조용히 다른 거래자들과 미팅을 하며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란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뿐이었다. 린도는 범천을 배신한 자들을 처리하면서도 자신에게 문자 한 통 주지 않는 아키라가 밉기보다, 그저 대화라도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아키라가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녀는 늘 살아있지 않는 눈동자로 자신들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린도는 아키라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다. 자신이라는 새장을 벗어나 바깥으로 날아가려는 그녀를 린도는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저 대화하지 않은 체 무표정으로 있는 그녀를 더욱더 곁에 두고 애정을 갈구하며 사랑이라는 형태를 붙잡고 싶었다.
하이타니 형제가 퇴근하기 전, 아키라가 먼저 퇴근해 집에서 조용히 물을 끓여 가볍게 차 한잔을 하고 욕실에 들어가 잔잔하게 흐르는 욕조 물을 바라봤다. 두 사람이 없는 공간은 이리도 평온한데, 들어오면 순식간에 뒤바뀌는 공기에 아키라는 갑갑할 정도였다. 아키라는 자신을 좋아하는 린도를 이해할수 없을 뿐더러 더욱히 같이 동거하고 있는 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불쾌감이 들정도로 싫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어둠속에서 속삭이는 정체모를 심연이 자신을 들여다보는것 같았다. 아키라는 욕조에서 나와 물을 빼고 두사람이 들어오기 전 서둘러 속옷과 잠옷을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갔다.
란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아키라의 모습은 거실에 없었지만 그녀가 지나간 자리들에 남은 흔적들이 아키라가 여기 있었다는 듯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린도가 아키라에게 줄 소바를 사 왔기에 그가 방문을 두드리자 아키라가 그에게 말한다.
"내 방에 들어오지 마, 하이타니."
"네가 좋아하는 소바 사 왔어, 아키. 문 열어."
몇 분간의 침묵이 울리고 덜그럭 거리는 소리에 잠시 뒤를 돌고 있던 린도가 문을 열고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키라의 모습에 왼손에 들려있던 소바가 든 봉지를 내밀었다. 아키라는 그에게서 받은 봉투를 받아 들고는 거실로 나와 부엌 천장에서 그릇을 꺼내려고 들었다. 생각보다 깊은 곳에 있는 그릇 때문일까, 아키라의 손이 닿지 않자 린도가 나서서 그녀에게 검은색의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아준다.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멀리 있어서 닿지도 못했잖아."
린도의 말에 아키라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소바를 먹으려는 찰나, 소파에서 자신을 보고 다정하게 웃는 모습에 속이 뒤틀린다는 듯 그릇과 봉투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문을 닫은 체 들어가 버렸다. 린도가 란을 보며 어이가 털렸다는 듯 보고 있지만, 란은 유감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키라가 들어가던 말던 신경 쓰지 않았다. 린도는 인상을 찌푸린 체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개를 피우고 몇 분 후, 소바 그릇을 치우러 나온 아키라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피우던 담배를 끄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조용히 설거지만 하고 돌아가고 싶었던 아키라였지만,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아 말없이 있는 린도의 행동에 체념한 체 스펀지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린도는 뒤에서 아키라를 끌어안으며 자신의 가슴팍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심장소리와 목에서 느껴지는 비누냄새에 끌어안고 있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차갑게 내려오는 물로 행군 후 선반에 그릇을 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아키라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놓지 않는 린도의 행동에 짜증이 밀려와 그에게 말했다.
"방에 들어갈 거니까 이거놔."
"잠시만 이러고 있자, 아키."
"..... ."
아키라의 말에 린도가 그녀를 놔주자, 아키라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나오지 않았다. 린도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과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란의 눈초리가 싫었기에 문을 걸어 잠가 놓았다. 란이 방으로 들어가고 린도 역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을 때, 그녀에게서 느껴진 온기와 향이 잊혀지지 않았다는 듯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조용히 아키라를 상상한다. 도쿄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흑단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그녀가 밤색의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입은 체 유유히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곳으로 걸어갈 때, 린도가 아키라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린도를 향해 뒤를 돌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어떠한 혐오도, 증오도 없이 안광이 태양에 비치는 바닷물처럼 눈부신 미소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이타니.'
아, 심장이 타오르는 것은 언제였던가. 린도는 자신의 눈앞에서 보이는 여인, 타마키 아키라의 미소가 마치 자신의 심장을 찌른 황금의 화살과도 같았다. 설령 이것이 꿈이라고 해도 린도는 아키라의 미소를 영원히 담고 싶었다. 꿈에서만 아니라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그 현실에서도 아키라의 미소를 보고 싶었다. 따스한 손길과,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진홍빛의 입술마저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겨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 속으로 당기고 싶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키라의 눈빛에 린도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흘려듣고 아키라를 향해 말한다.
'아키, 내 곁에 있어줘.'
숲을 뛰어다니며 갈증에 목이 메어버린 사슴처럼 린도의 심장은 점점 더 요동쳤다. 린도가 아키라의 입술에 살포시 닿으려 하는 순간, 자신의 쌍둥이 형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린도-'
알고 있다, 란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하지만 린도는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아키라가 미소 짓고 있다.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은 몽환(夢幻) 속에서 린도는 아키라를 그 누구에게도 뺏기기 싫었다. 그가 아키라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고 조용히 속삭이려는 순간, 란의 목소리가 린도의 귓가를 울렸다.
"린도-, 일어나야지."
자신의 귓속으로 울리는 란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햇빛으로 빛나던 항구와 바람은 어디로 가고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조용히 웃고 있는 란의 모습에 끌어안고 잔 베개로 얼굴을 가렸다. 하필 이 모습을 자신의 형에게 보였을 줄은 몰랐다는 듯 그는 베개에 얼굴을 파 묻은 체 끄응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로 돌렸다. 란은 그런 쌍둥이 동생의 모습에 귀엽다는 듯 뒤로 돌아서 누운 린도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린도, 이제 일어나야지. 총장이 기다리고 있어."
"형님이 하필 타이밍 좋을 때 날 깨워서 머리 아프다고..."
"아키라는 벌써 출근했어, 린도."
그는 끌어안고 있는 베개를 놓고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고 세수를 하다가 이내 수건 한 개를 들고 샤워를 시작했다. 뜨거운 수증기와 샤워기로 내려오는 물줄기에 린도는 자신의 꿈에 나타난 아키라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런 미소를 한 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키라를 어떻게 놔줄 수 있겠는가, 따스한 온기에 잠시 환상이 보이는 찰나 린도가 슬그머니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형이 등 닦아줄까?"
"내가 알아서 닦을 테니까 형님은 밖에 있어."
란이 문을 닫고 린도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그는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는 내내 웃고 있는 아키라에 대한 것만이 머릿속으로 가득 차 있었다. 란이 차를 운전하며 조수석에 있을 때도, 마이키가 다른 간부들을 불러 회의를 진행할 때도, 린도의 머릿속에는 그저 아키라만이 있었다. 뒷골목에서 조용히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손에 남겨진 핏물을 화장실에서 지워내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아키라를 다시 봤을 때, 꿈에서 본 미소는 어디로 가고 자신을 보는 허무의 눈동자만이 연한 자수정색으로 물들인 거울처럼 자신을 마주할 뿐이었다. 아키라가 떠나간 자리에는 그녀가 떨어뜨리고 간 종이들만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뿐이었다. 린도는 조용히 그녀가 떨어뜨린 서류들을 주워 거래처와 미팅을 하고 있는 방으로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연 산즈가 웬일로 란 없이 온 린도를 보며 그의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아키라에게 전달한 뒤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닫힌 문을 뒤로한 채 창고에서 거래 물품을 빼돌린 자들의 처리를 하고 있는 란이 있는 곳으로 가자, 방안에 튀어진 피와 쓰러져서 미동도 없는 인간들의 등에 앉아 있던 란이 자신의 동생이 돌아는 모습에 웃는 표정으로 자리에 일어났다.
"아키에게 잘 전달해주고 왔니?"
"형님이 그것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내가 잠시 화장실에 들렸는데 그 광경이 보였지 뭐야."
".................."
"그 애가 그렇게 좋아?"
란의 질문에 린도는 움찔거리며 손에 들고 있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좋아, 아키가 나만 바라봐줬으면 좋겠어. 린도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면, 그의 심장은 마치 움직이는 태엽장치처럼 린도의 귓속을 울렸다. 긴장한 그의 뒤로 란에게 맞아 쓰러졌던 남자가 나이프를 들고 린도를 노렸을 때, 란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총으로 그를 쏴버렸다. 린도가 뒤를 돌아 있으니 란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한눈팔면 네 목숨도 없는 거 란다, 린도."
"알겠어, 형님..."
사람이 사랑을 하면 온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더니, 린도 너에게도 마찬가지구나. 란은 살며시 린도를 쓰다듬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린도는 피가 튀어있는 공간으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음과 언덕을 이루는 시체들의 위로 밑을 내려다봤다. 이곳에서 아키라가 자신을 본다면 자신을 경악하는 표정도 아닌 이미 마음의 영혼조차 미동하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는 생각에 그는 피비린내 나는 언덕을 내려오고 문을 열고 들어온 모치즈키 '칸지'를 보고는 이내 붉게 번져버린 자신의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린도가 칸지의 곁을 지나갈 때, 칸지는 멍하니 걸어가는 그를 보며 처리일만 도맡다 보니 정신이 나가버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내 산처럼 쌓인 시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기 시작했다. 멍하니 화장실에서 피로 물든 손을 씻고 다시 화장실로 나왔을 때, 아키라가 린도를 보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가 아키라의 팔을 붙잡았다.
"뭐 하는 거야?"
"나랑 얘기 좀 해, 아키."
"싫어."
단칼에 거절하는 아키라의 말에 린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이대로 놓는다면 두 번 다시 아키라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양이 지는 창가의 너머로 아키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린도의 눈빛에 그저 무념무상으로 바라봤지만, 지금의 표정은 마치 떠나가면 더 이상 볼수 없을것 같다는 눈빛을 띄고 있기에 아키라는 자신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린도에게 말했다.
"서류 놓고 올 테니까 기다려."
아키라는 린도의 손을 그대로 뿌리친 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놓으러 사무실로 들어갔다. 린도는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아키라의 모습에 다시 한번 요동치는 심장소리를 무시한 체 그녀를 이끌고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복도를 걸어 다니며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아키라가 순순히 따라오는 모습에 린도는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도착하자, 희미하게 들리는 소음을 제치고 밴치에 앉아 있는 아키라를 향해 말했다.
"아키."
"할 말이 뭐야, 하이타니."
"이대로 내 곁에 있어줘, 아키. 난, 널 원해."
린도의 고백에 아키라는 그저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계속해서 얽매여 오는 이 남자가 하는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시선을 돌린 체 린도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키라가 자신의 고백에 이미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린도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길 원했다. 아키라는 자신을 향해 고백하는 보랏빛의 남자가 싫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그림자가 밑으로 흘러나와 자신의 다리와 팔을 잡고 천천히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 또다시 어둠에 삼켜져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치 자유를 향해 날아다니고 있는 새가 생전 본 적도 없는 인간들에게 붙잡혀 새장 안에 갇혀버린 체 하루하루를 노래하는 것처럼, 아키라는 하이타니 형제라는 새장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린도의 말에 아키라가 대답한다.
"싫어."
아키라의 대답에 린도는 무너질 것 같은 표정도 짓지 않은 체 그녀를 바라봤다. 심연의 어둠으로 가라앉은 해의 곁으로 아키라와 린도의 그림자만이 노을 진 옥상에 남아 있었다. 해가 커튼콜을 내리듯 서서히 내려가는 모습에 아키라가 린도의 곁을 떠나려는 순간, 린도는 그녀의 뒤를 끌어안았다. 텅 빈 눈으로 린도의 애정조차 그저 자신을 옭아매는 쇠사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면 어디론가로, 자신에게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그에게선 잊을 수 없는 작은 고통과 같았다. 아키라가 없어지면 그는 평소의 모습조차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려움과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 그녀가 다른 이의 품에 있다면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처럼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 생각에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를 놓을 수 없었다. 아키라는 그런 린도가 싫었다.
집에 돌아오면 풍겨오는 비릿한 피 냄새와 그들의 곁에 있으면서 불쾌한 폭력의 현장이 이미 아키라의 기억 속에 필름처럼 담겨 그 기억이 재생되는 영사기처럼 아키라는 그 끔찍한 순간이 하나씩 떠오르는 탓에 점점 그녀를 움직이는 태엽이 멈추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짖던 표정도, 다정한 온기를 가지고 있던 성격도 서서히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이타니 린도가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린도의 손길을 뿌리치고 밑으로 내려갈 때, 그는 점점 멀어져 가는 아키라의 발걸음 앞에 그저 서있는 체 승강기에 탄 모습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란이 차를 몰고 린도와 아키라를 태운체 도로를 달릴 때, 두 사람의 적막한 흐름에 백미러로 살짝 뒷좌석의 아키라를 보고 있으니,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다시 방향을 틀어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핸들을 돌렸다. 세 사람이 차에서 내리고 아키라가 먼저 승강기에 올라타 문을 그대로 닫아버리니, 란은 자신의 곁에 있는 린도에게 물었다.
"오늘 둘이 싸웠어?"
"아냐, 아키라랑 대화만 했어."
"대화로 한 거 맞지?"
"협박 안 했으니까 그만 물어봐, 형님."
린도의 투덜거림에 란은 그런 동생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고 지하로 내려온 승강기의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20층버튼을 누른체 아무런 말도 안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아무말도 안하는 린도의 모습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였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층에 도착하자마자 두사람은 천천히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의 문을 열어 조용히 신발을 벗어두고 외투를 벗고 란은 잠시 화장실로, 린도는 열리지 않는 아키라의 방문 앞에 서있었다. 문을 두드리면 그녀가 문을 열어줄까, 들어오지 말라고 말을 할까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아키라가 먼저 문을 열었다.
"무슨 용건이야, 하이타니."
텅 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키라의 눈빛에 린도는 잠시 침을 삼키고 그녀를 향해 말하려는 순간, 란이 두 사람에게 저녁밥이 다되었다는 듯 신호를 보내자, 열려있던 아키라의 방문이 닫히고 린도와 란, 두 사람만이 부엌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할 뿐이였다. 말없이 방에 들어가 있기만한 아키라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남아 있는 밥을 그릇에 담아 그녀가 있는 방문을 두드려 식사를 가져다 줄때, 문틈으로 연보라색의 눈동자가 란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지 확인한 후에야 린도에게 문을 열어줬다. 그가 책상에 밥을 내려놓고 아키라는 쟁반에 담겨있는 작은 숟가락을 들어 하얀 김을 뿜어내는 밥을 떠서 입안에 가져갔다. 두사람만이 있는 방안에는 어떠한 무거운 흐름도, 붉은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키라가 밥을 다 먹은 후에 쟁반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 밥그릇을 놓는 순간까지도 린도는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키라의 눈빛은 린도의 심장을 천천히, 아니 빠르게 뛰게 만들지 않았다.
밤 11시가 돼서야 아키라가 잠에 들고 샤워를 끝낸 린도가 조용히 그녀의 방문을 열었다. 적갈색의 이불을 덮은 체 옆으로 누워있는 아키라의 모습은 마치 그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든 미녀처럼, 린도는 살포시 침대 옆에 앉아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도 모른 체 조용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린도는 란이 없는 방 안에서 조심스레 아키라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내려놓았다. 린도는 자신의 눈앞에 잠들어버린 아키라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을 뒤로한 채 가려고 해도 그는 아키라라는 이 여자를, 사랑스러운 아키를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아키라가 몸을 뒤척이자, 린도는 침대에서 일어나 벽 쪽으로 등을 돌린 그녀의 모습에 살짝 미간이 일그러진 체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린도는 자신이 있는 아키라의 방을 나가기 싫었다. 지금 이대로 단둘만이 남아 있는 이 공간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